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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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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링 수트 : 포켓, 라펠, 벤트로 완성하는 디테일

테일러링 수트 : 포켓, 라펠, 벤트로 완성하는 디테일

2025.01.07

2025.01.07


 

Editor 배터리(Better Lee)
[잇(it)템 졸업식]
 

남성 패션의 완성은 단연 수트다. 하지만 진정한 품격은 디테일에서 완성된다. 테일러링(Tailoring)은 착용자의 체형에 완벽하게 맞추는 수트 제작 기술을 의미한다. 500년간 이어져 온 이 장인정신은 오늘날 현대 신사복의 기초가 되었다.

휴대폰과 지갑을 담는 실용적인 공간이자, 무심코 손을 넣게 되는 안식처와도 같은 포켓. 수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얼굴이자, 착용자의 품격을 완성하는 라펠. 움직임의 자유로움을 선사하며 테일러링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벤트까지. 이 세 가지 디테일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시대의 필요와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오늘은 수 백년 동안 실용성에서 출발해 미학적 가치를 더해온 수트의 디테일을 살펴보며, 현대 테일러링의 정수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파우치에서 시작된 포켓의 역사


 

16-17세기에 사용한 파우치 ©Victoria and Albert Museum

포켓의 시작은 의외로 옷과는 무관했다. 16세기까지 사람들은 개인 용품과 귀중품을 옷 속 허리춤이나 벨트에 묶은 파우치에 보관했다. 그러다 17세기 들어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리자, 자연스레 옷의 재봉선을 따라 파우치를 숨겨 넣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당시 유행하던 풍성한 실루엣의 의복은 이러한 수납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부티크 앞에 있는 가브리엘 샤넬, 1913년(좌) ©Collection Deauvilloise, Deauville / 1958-1959 FW 오뜨 꾸뛰르 컬렉션 수트를 입은 마리 엘렌 아르노(Marie-Hélène Arnaud) ©Sante Forlano ©Vogue

19세기에 이르러 남성복이 체형에 맞게 변화하면서, 파우치는 자연스럽게 의복과 일체화되어 오늘날의 포켓으로 진화했다. 반면 여성복에는 20세기 초까지도 포켓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실용적인 디자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20년대 샤넬포켓이 달린 여성용 재킷을 선보이며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이는 단순한 디자인의 변화를 넘어 여성들의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제티드 포켓 수트를 입은 윈저 공(좌) ©karsh.org / 제티드 포켓(우) ©thecreativecurator

제티드 포켓(Jetted Pocket)

입구를 천으로 둘러싸고 위아래 주머니 입술의 두께가 좁은 것이 특징인 제티드 포켓은 영국 테일러링의 정수를 보여준다. 19세기 영국 신사복에서 시작된 이 포켓은 현대 턱시도와 포멀 수트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주머니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절개선만 보이는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수트의 완벽한 실루엣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

 

 

'007 골드핑거' (1964)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숀 코너리의 플랩 포켓 자켓(좌) ©Getty / 플랩 포켓(우) ©sewgenerously.org

플랩 포켓(Flap Pocket)

덮개가 달린 호주머니를 일컫는 플랩 포켓은 실용성세련미를 동시에 추구한 결과물이다. 비와 먼지로부터 주머니 속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이 디자인은 시간이 흐르며 수트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특히 20세기 초반 비즈니스 수트의 대중화와 함께 현대 수트의 정석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패치 포켓 ©thedecorum

패치 포켓(Patch Pocket)

옷 위에 따로 천을 대어 붙인 패치 포켓은 제작이 용이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다. 20세기 초 스포츠웨어와 아웃도어 의류에서 발전했으며, '아웃 포켓'이라고도 불린다. 일명 '건빵 주머니'로 알려진 군용 포켓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파오의 아웃포켓 오버핏 자켓

승마, 사냥, 사이클링 등 활동적인 외부 활동을 위해 발전한 패치 포켓은 망원경이나 탄창 같은 큰 물건도 수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사파리 자켓에서 발전한 이 디자인은 주름(플리츠)을 더해 수납력을 높인 카고 포켓의 모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캐주얼 블레이저스포츠 코트에서 주로 활용되며,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링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로 사랑받고 있다.

 

 

라펠, 군복에서 시작된 신사복의 상징

라펠(Lapel)은 코트나 재킷의 앞몸판이 깃과 하나로 이어져 접어 젖혀진 부분을 뜻한다. 라펠의 기원은 18세기 유럽 군복에서 찾을 수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코트의 칼라를 세워 입던 군인들이 상황에 따라 이를 접어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라펠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보 블루멜 ©theconversation

이러한 실용적인 디자인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더욱 세련되게 진화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귀족적이고 화려했던 남성복은 점차 실용적이고 절제된 형태로 변모했다. 특히 영국의 패션 아이콘 보 브루멜이 1800년대 초 제시한 새로운 남성복 스타일은 현대 수트의 기초가 되었고, 그가 즐겨 입었던 프록 코트의 라펠 디자인은 오늘날 수트 라펠의 원형이 되었다.

 

 

베이직 재킷 ©스파오

노치드 라펠(Notched Lapel)

라펠의 중간 부분에 V자 모양의 노치가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노치드 라펠은 군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군인들이 목을 감싸는 높은 깃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윗단추를 풀고 깃을 양옆으로 펼쳐 입으면서 현재의 라펠 형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디자인이 민간인들에게도 유행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노치드 라펠로 발전했고, 현대에는 비즈니스 수트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좌측부터 아브라함 링컨, 톰 포드, 냇 킹 콜 ©GQ

피크드 라펠(Peaked Lapel)

라펠 윗부분이 칼라의 아랫부분보다 높게 솟은 독특한 디자인의 피크드 라펠은 영국 해군 장교들의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왕실이 애용하면서 포멀웨어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턱시도나 결혼식 등 격식 있는 자리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 디자인은 전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부터 디자이너 톰 포드까지, 시대를 초월해 카리스마 있는 착용자들의 선택을 받아왔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2021)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좌) ©Bond Suits / 데이비드 베컴(우) ©Getty

숄 라펠(Shawl Lapel)

칼라와 라펠이 경계없이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숄 라펠은 주로 예복용으로 사용된다. 19세기 영국 신사들의 여유로운 일상에서 탄생했는데, 담배를 피우며 독서나 대화를 즐기던 실내용 재킷의 부드러운 곡선형 라펠이 오늘날의 디자인으로 이어진 것이다. 절제된 우아함을 표현하는 이 디자인은 시간이 흐르며 턱시도디너 재킷의 대표적인 라펠로 진화했고, 현대의 포멀웨어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벤트, 문화가 만든 세계의 테일러링

벤트(Vent)는 코트나 재킷의 뒤쪽 아래에 터 놓은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뒷트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디자인의 역사는 18세기 영국 승마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국 신사들의 필수 활동이었던 승마를 위해, 재킷 뒷부분에 트임을 넣어 안장에 앉았을 때 옷자락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한 것이 시초다. 이러한 실용적인 디자인은 이후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Getty

더블 벤트(Double Vent)

수트 자켓의 뒷면에 양쪽으로 트임이 있는 더블 벤트는 영국 테일러링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빌 로우의 장인들이 완성한 이 디자인은 승마할 때 재킷이 안장 양쪽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도록 설계되었으며, 사냥과 같은 귀족 스포츠를 위해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다.

 

 


 

테일러드 오버핏 울자켓 ©미쏘

싱글 벤트(Single Vent)

뒤 중앙에 한 개의 트임이 있는 싱글 벤트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탄생한 실용주의의 산물이다. 브룩스 브라더스를 선두로 한 기성복 브랜드들이 제작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고려해 채택한 이 디자인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의 현대적 의류 문화를 대표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핸드메이드 스탠카라 자켓 ©미쏘

벤트리스(Ventless)

트임이 전혀 없는 벤트리스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독특한 테일러링 문화에서 발전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앉을 때 주름이 생길 수 있지만, 실루엣 자체로는 가장 완벽한 형태를 보여준다.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와 날렵하고 세련된 실루엣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미학이 만나 완성된 스타일이다.

 

 

포켓, 라펠, 벤트는 단순한 디자인 요소를 넘어 시대와 문화가 만들어낸 테일러링의 정수다. 실용성에서 출발해 미학적 가치를 더해온 이 디테일들은 현대에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에 담긴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수트를 고르는 안목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