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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곁을 떠나간 미스터 클러치, 제리 웨스트

팬들의 곁을 떠나간 미스터 클러치, 제리 웨스트

2024.06.26

2024.06.26


 

지난 2024년 6월 12일, LA 레이커스의 레전드 '제리 웨스트'가 향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NBA 선수 커리어의 전부를 LA 레이커스에서 보낸 프랜차이즈 선수,* 제리 웨스트.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수많은 팬과 NBA 선수들은 SNS를 통해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바로 다음날, NBA 사무국은 NBA 파이널 3차전이 시작하기 직전 경기장에 모인 이들과 함께 제리 웨스트를 기리며 추모하는 시간을 결정하기도 했다.


*프랜차이즈 선수: 소위 말하는 '간판선수'로, 해당 구단에 소속되어 활약하며 해당 구단의 이미지를 보인 선수


※ NBA 파이널 3차전 제리 웨스트 추모의 순간 (출처: NBA on ESPN)

"I am so deeply saddened at the news of Jerry's passing. He was truly a friend and a mentor. Like an older brother to me. ... Rest in Peace, Logo."
(제리가 떠났다는 소식에 저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는 나에게 진정한 친구이자 멘토였어요. 마치 큰 형처럼요. 편히 쉬어요. 로고)
- 제리 웨스트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움을 남긴 마이클 조던

"The LOGO & Mr. Clutch"

제리 웨스트는 사람들에게 '로고'(Logo)*로 불린다. 하지만 현역 시절 그의 별명은 '미스터 클러치'(Mr. Clutch)였다. 탁월한 개인기와 슛 능력,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팀의 해결사로 나서는 그의 모습은 미스터 클러치가 되기에 충분했다. 제리 웨스트는 당시 NBA를 평정하던 보스턴 셀틱스의 스타, 빌 러셀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빌 러셀 왕국에 도전하는 제리 웨스트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당시 NBA 팬들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 로고: NBA 로고 속 실루엣은 제리 웨스트를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 안타깝게도 제리 웨스트는 빌 러셀이 활약하던 60년대 단 한 번의 우승도 차지하지 못한다.


 

※ 현역 시절 제리 웨스트의 모습

 

사실, 제리 웨스트의 유년 시절은 코트 위의 그의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리 웨스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일삼았고, 그가 의지했던 친형은 한국 전쟁에서 22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두운 가정환경 속에서, 제리 웨스트는 지독히 내성적인 성향으로 자랐다.

제리 웨스트는 체격도 작고 왜소했다. 의사는 쉽게 다칠 수 있는 운동은 피하라고 권유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운동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제리 웨스트는 이웃집 창고에 걸려 있던 농구 골대에 무심코 슛을 던졌다. 공이 링을 통과해 들어갔고, 그 순간 제리 웨스트는 그의 인생에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수 많은 농구공을 던져서였을까, 고등학교 입학 당시 그의 키는 183cm까지 자랐다. 제리 웨스트는 고교 농구팀에 들어갔고, 경기당 33.2득점을 기록하며 대학 리그에서 가장 눈독 들이는 선수가 되었다. 대학 리그에 올라간 후에도 그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2년 연속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60년에는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며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 1960년대 제리웨스트가 속한 미국 농구 대표팀 (가장 우측 하단)

 

1960년, 제리 웨스트는 NBA에 입성한 첫해부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는 장거리 슛과 적재적소에 찔러주는 패스가 특기였는데, 이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2010년 이후 듀얼 가드*로 불리며 유행했다. 또, 그는 경기 운영과 득점이 모두 가능한 선수였다. 그는 메인 볼 핸들러**로 활동하면서도 통산 평균 득점 27점***을 기록했다. 현재 현역 레전드로 불리는 르브론 제임스의 통산 평균 득점이 27.2점인 것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높은 득점력을 갖춘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 듀얼 가드 : 보통 포인트 가드가 볼 운반과 경기 조율, 슈팅 가드가 득점을 주 임무로 담당하는데, 듀얼 가드는 2가지 임무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이야기한다. 2010년대 유행하기 시작한 선수 유형으로 대표적으로 스테판 커리와 카이링 어빙, 제임스 하든 같은 선수들이 있다.
** 메인 볼핸들러: 우리 코트에서 상대 코트까지 공 운반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 보통 다른 역할에 비해 득점력이 낮다.
*** 현역 레전드로 평가받는 르브론 제임스가 27.2점으로 같은 수준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3점슛 제도가 없었기에 제리 웨스트가 더 높은 득점력을 가졌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 제리 웨스트의 장기였던 장거리 풀업 점퍼

 

제리 웨스트의 높은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팀은 1960년대에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다. 하지만 1969년 시즌부터 그의 커리어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해당 시즌에 제리 웨스트는 NBA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준우승팀 소속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또, 1970년 시즌에 제리 웨스트는 당대 최고의 센터였던 윌터 챔버레인과 함께 팀을 이루며, 역대 최고 승률인 69승 13패를 기록했다. 이어서 1972년 시즌에는 NBA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33연승*을 기록하며, 데뷔 11년 만에 파이널 우승을 달성했다.

* 보통 파이널 MVP의 경우 우승 팀에서 선정되나, 69년 당시 LA 레이커스가 3-4로 시리즈 패배를 하였음에도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 NBA 2번째 최다 연승 기록은 르브론 제임스의 27연승으로, 제리 웨스트의 33연승과 무려 6연승이나 차이 난다.


 

※ 71년 시즌 LA 레이커스의 주역이였던 윌터 챔버레인(중앙)와 제리 웨스트(우)

 

1974년, 제리 웨스트는 화려한 기록을 뒤로하고 NBA 선수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그는 선수 시절보다 감독, 단장 등 행정가로 더 큰 업적을 세웠다. 선수 시절에는 단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파이널 우승을 행정가로서는 8번이나 거머쥔 것이다.

제리 웨스트는 당대를 대표하는 슈퍼 팀을 직접 구성한 행정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1980년대, LA 레이커스 최고의 전성기라 불리는 '쇼타임 레이커스'*를 시작으로,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의 'LA 레이커스 왕조'*, 스테판 커리와 클레이 탐슨의 'GSW 왕조'*까지. 모두 제리 웨스트가 LA 레이커스의 단장 혹은 임원으로 재임하던 시절 만들어낸 팀이다.


*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으로 대표되는 76-77시즌부터 88-89 시즌까지 약 12년간의 LA 레이커스를 일컫는다. 해당 기간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으로 대표되는 팀으로 당시 LA 레이커스 최초로 3연속 우승에 성공한다.
*** 스티브 커 감독 취임 이후 스테판 커리를 중심으로 5년간 파이널에 연속 진출, 총 3번의 파이널 우승을 달성한다.


 

※ 코비 브라이언트와 친밀하게 지냈던 제리 웨스트

 

제리 웨스트가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NBA에서 보여준 활약만큼, 팬들 사이에서 그를 부르는 수 많은 애칭이 있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팬들은 그는 '로고'로 기억한다. 그 이유는 NBA의 로고가 제리 웨스트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제리 웨스트와 NBA 로고

 

NBA 사무국은 제리 웨스트가 로고의 모델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팬들이 그를 'THE LOGO'라고 부르는 것에도 별도의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다. NBA 사무국과 선수 그리고 팬들 모두, 그가 NBA에 남긴 역사적인 순간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제리 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팬들은 여전히 그를 '더 로고'라고 명명하며 기리고 있다. 아마 제리웨스트는 앞으로도 NBA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팬들에게 기억되는 선수로 남을 것이다. 



 

* 제리 웨스트의 실착 저지(이랜드 뮤지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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