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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데려온 좌완 파이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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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에 공포를 던졌던 투수, BIG UNIT 랜디 존슨
타석에 공포를 던졌던 투수, BIG UNIT 랜디 존슨
2024.06.12
2024.06.12
2001년 5월 9일 애리조나의 뱅크 원 볼파크에서 열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신시내티 레즈의 경기.
마지막 9회 초, 경기 스코어는 1:1. 양 팀 선발 투수의 팽팽한 대결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모든 이들의 시선은 37세 노장 선수 '랜디 존슨'의 왼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8회까지 18개의 삼진을 잡았던 랜디 존슨. 9회에 마지막 타자만 삼진으로 잡아낸다면, 9이닝 20삼진이라는 메이저리그 대기록 달성이 가능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타자는 독보적인 타격 능력을 지닌, 후안 카스트로였다. 초구는 바깥쪽 볼. 한숨 돌린 랜디 존슨은 곧바로 몸 쪽 직구와 슬라이더로 연거푸 2개의 스트라이크를 잡는다. 그리고 4구, 랜디 존슨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던 공인 포심 패스트볼을 선택한다. 랜디 존슨의 손끝을 떠난 공은 결국 타자의 배트에 닿지 못했고, 랜디 존슨은 포효한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3번째 9이닝 20삼진 투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27개의 아웃카운트 중 20개의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낸 기록으로, 투수는 매 이닝마다 2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해야 한다. 역사상 단 4명의 투수(로저 클레멘스, 케리 우드, 랜디 존슨, 맥스 셔저)만이 이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퍼펙트게임이 24번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20 삼진이 얼마나 진귀한 기록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BIG UNIT"
208cm에 102kg이었던 그는 데뷔 전부터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강속구 투수였다. 야구 명문인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해 팀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강속구는 많은 야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일례로 랜디 존슨과 대학교 동문이었던 마크 맥과이어*는 후배로 입학한 랜디 존슨의 투구를 보고 투수의 꿈을 포기할 정도였다.
*마크 맥과이어 : 1990년대 활동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1루수이자 대표적인 파워 히터. MLB 신인 역사상 최다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한 당대 최고의 홈런 타자이다. 이후 부정 약물 투약 사실이 밝혀지며 쌓아온 명성을 모두 잃게 된다.
랜디 존슨은 대학 졸업 이후, 압도적인 구위를 인정받으며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제구였다. 그의 장기였던 160km대의 직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리그 내 투수 중 볼넷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제구가 좋지 못했다. 그 후에도 그의 제구는 개선되지 않았고, 강한 공이 있어도 쓸모없는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1992년 랜디 존슨은 본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은인을 만난다. 바로 메이저리그 대표 강속구 투수인 놀란 라이언이었다. 시즌 중 상대 팀으로 만났던 두 사람. 랜디 존슨은 놀란 라이언을 찾아가 솔직하게 고민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한다. 놀란 라이언은 랜디 존슨에게 본인이 제구 문제를 해결했던 방법을 그대로 전수해줬고, 이 조언으로 랜디 존슨은 제 2의 야구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 9이닝 당 평균 볼넷이 5개가 넘었던 랜디 존슨은 놀란 라이언을 만난 1992년 이후 은퇴할 때까지 9이닝 당 볼넷 4개를 단 한 번도 넘기지 않으며 괄목상대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3년, 운동 선수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서른에 랜디 존슨은 19승 8패 방어율 3.24, 308개의 삼진과 99개의 볼넷을 기록하며 리그를 압도하는 투수로 발돋음한다. 당시 모든 야구 관계자들이 놀랐던 사실은 보통 투수들은 제구를 위해 구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랜디 존슨은 제구를 갖추면서도 자신의 장기인 160km가 넘는 구위는 유지했다는 것이다.
랜디 존슨의 압도적인 구위는 1993년 올스타전, 존 클럭*과의 대결에서 우연히 증명된다. 당시 랜디 존슨은 164km에 육박하는 강력한 공을 실수로 존 클럭의 머리 쪽으로 던지게 됐는데, 이 공에 놀란 존 클럭이 배터 박스 가장 바깥쪽으로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이 생방송으로 송출되었다. 경기 후 존 클럭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에 맞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라고 말하며, 그의 공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몸소 증언한 인물이 되었다.
“Stepping the box, I said all I wanna do is just contact. But after first pitch, all I wanna do is live. And I live. So I am good at Bat”
(처음에 타석에 들어설 때는 그냥 컨텍만 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랜디 존슨의 첫 공을 본 후에, 제 목표는 컨텍이 아니라 살아나가는 걸로 바뀌었죠. 전 그 자리에서 살아 나온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이후 랜디 존슨은 1995년 커리어 최초로 사이 영 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보낸다. 그리고 1999년 마침내 그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이적, 메이저리그 팬들이 기억하는 수많은 전설의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이 기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비둘기 사건'*이다. 경기 중 랜디 존슨의 투구가 날아가던 비둘기를 맞춘 것. 당시 비둘기가 마치 폭발하듯 털이 휘날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며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 이후 일부 학자들은 "동일한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190억분에 1"이라는 수치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와의 4년의 계약 기간 동안 랜디 존슨은 누적 81승 27패, 2.48의 평균 자책점과 1417개의 탈삼진을 기록. 4년 연속 사이 영 상과 월드 시리즈 우승, 그리고 월드시리즈 MVP*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이 계약은 MLB.COM에서 직접 선정한 역대 FA 계약 1위에 랭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FA 계약 사례로 남게 된다.
* 커트 실링의 블러디 삭스 사건으로도 유명한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랜디 존슨은 커트 실링과 공동 MVP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 랜디 존슨은 2003년까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2004년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는데, 16승과 더불어 평균자책점 2.6, WHIP* 0.9로 한 이닝당 1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는 전성기 시절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또한 역대 최고령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며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한 기량을 뽐냈다.
*WHIP : 피안타 수와 볼넷 수의 합을 투구 이닝으로 나눈 값으로, 한 이닝에 몇 명의 주자를 내보냈는지 나타낸다. 보통 리그 최상위권 에이스가 1.0 전후의 기록을 선보이며, 0점대의 기록은 최상위권 선수들의 최고 전성기 시절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후 뉴욕 양키스, 애리조나, 샌프란시스코 등으로 팀을 옮겨가며 선수 활동을 이어가던 랜디 존슨은 시즌 45세의 나이에 누적 303승, 4875개의 삼진을 잡으며, 300승 클럽 안착과 역대 메이저리그 누적 삼진 2위*의 기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 역대 좌완 중 최고 삼진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 가장 많은 삼진을 잡은 투수이기도 하다.
그를 대표하는 구종은 160km를 넘나드는 포심 패스트볼과 140km 중반대의 각이 큰 슬라이더다. 빠르고 묵직한 직구도 일품이었지만, 큰 키와 긴 팔을 활용해 쓰리쿼터 형식으로 던지는 슬라이더는 좌타자에겐 쥐약이었다. 그의 공을 경험한 좌타자는 "뒷통수에 맞을 것 같던 공이 한 가운데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메이저리그 타자로 활약했던 해설가 애릭 캐로스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선수들이 랜디 존슨의 글러브를 집는 습관*으로 그가 직구와 슬라이더 중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도 칠 수가 없었다며, 그를 가장 무서운 타자로 꼽기도 했다.
* 랜디 존슨은 글러브를 오므리면 직구를, 넓게 퍼트리고 있으면 슬라이더를 던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2015년, 랜디 존슨은 97.3%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첫 해에 입성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0% 득표를 기대했으나 당시 미국 야구기자 협회 일부에서는 랜디 존슨과 같이 당연히 뽑힐 선수에게 자신의 표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일어나며 총 549표 중 534표 득표, 역대 8위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은퇴 이후 랜디 존슨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대표 및 CEO 보좌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유독 한국과의 인연이 많은데, 임수혁 선수 돕기 행사*를 위해 당시 자신의 별명 'BIG UNIT'이 새겨진 모자를 경매품으로 내놓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그의 둘째 딸인 윌로우가 V-리그 여자부의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에 입단하며, 그가 직접 한국으로 응원 영상을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롯데 자이언츠의 임수혁 선수가 경기 중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 판정을 받게된 사건으로 당시 국내외 스포츠 스타들이 임수혁 선수를 돕기 위해 자신의 애장품을 경매로 내놓았다.
은퇴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최고의 좌완투수로, 리그를 대표하는 파이어 볼러로 불리는 랜디 존슨. 2002년 사이 영 상 4연패에 성공하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그는 당시 수상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내준 대선배 놀란 라이언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27살 현역의 나이에 45세의 말년 노장 선배를 찾아갔던 랜디 존슨. 자신의 운동법에 자부심이 높은 선수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기에 당시 그의 행보는 큰 화제가 되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건 배움을 위해 과감하게 자신을 내려놓았던, 그 '용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랜디 존슨의 친필사인과 당시 날짜(2001년 5월 8일)가 적혀있다.(이랜드 뮤지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