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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로 얼룩진 대기록, 박찬호와 배리 본즈의 악연

약물로 얼룩진 대기록, 박찬호와 배리 본즈의 악연

2024.04.02

2024.04.02


 

Special Editor : 동아닷컴, 송치훈 기자님


스포츠 전문 기자 경력 10년, 야구 찐팬 경력 30년, 야구에 진심인 그만의 시선으로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메이저리그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해당 콘텐츠는 
Eland Museum의 특별한 소장품으로 MLB Park와 함께 제작하는 기획 콘텐츠 입니다.

2001년 10월 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LA다저스의 경기가 펼쳐진 퍼시픽 벨 파크(현 오라클 파크)에서는 홈런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 올해부터 이정후 선수가 뛰게 될 퍼시픽 벨 파크(현 오라클 파크)

 

이 경기는 당초 2001년 9월 14일로 예정되어 있던 경기였다. 하지만 그해 9․11 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연기됐다가 이날 치러졌다 

시즌 84승 75패의 다저스는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다. 89승 70패로 지구 선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2.5경기 차 2위였던 자이언츠도 이날 경기에서 패하면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승패와는 별개로 이날 경기 최대 관심사는 1998시즌 마크 맥과이어가 기록한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 70개를 배리 본즈가 경신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 커리어 중 총 7번의 MVP를 받았던 배리 본즈,
특히 2001년 그는 역대 최고의 MVP 시즌으로 평가 받는다

 

직전 경기였던 휴스턴 애스트로스 전에서 본즈는 신인 투수 윌프레도 로드리게스에게 시즌 70호 홈런을 뽑아내며 맥과이어와 동률을 이룬 상태였다. 남은 3경기에서 홈런을 1개라도 추가할 경우 본즈가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다.  

기존 기록 보유자 맥과이어는 이날 경기 전 본즈의 신기록 달성을 응원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70’ is a crazy number and we all thought it was crazy at the end of 1998. But now we’re looking at it like it’s not crazy”
(1998년 말에는 우리 모두 70이라는 숫자가 미친 숫자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미친 게 아니라고 생각하죠)


 

※ 다저스 타격코치 시절 마크 맥과이어
2010년대 타격코치로도 명성을 떨쳤다.

 

이날 자이언츠 홈 팬들은 경기 전부터 숫자 ‘71’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며 본즈의 신기록 달성을 염원했다.
하지만 경기는 홈 팬들의 기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시작됐다. 자이언츠 선발 숀 에스테츠는 단 2/3이닝만을 소화하고 0-3으로 뒤진 1회초 2사 2, 3루 위기에서 마운드를 내려가야 했다. 에스테츠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마크 가드너는 채드 크루터를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2사 만루를 만들며 다저스 선발투수이자 9번 타자 박찬호와의 맞대결을 선택했다.

* 고의사구 :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4개의 볼넷으로 타자를 1루로 내보내는 것. 


 

※ 타석에 들어선 박찬호 (출처 : 동아일보)

 

하지만 배트를 짧게 잡고 타석에 들어선 박찬호는 가드너의 5구째 변화구를 밀어쳐 우익선상에 떨어지는 2타점 적시타로 연결했다. 다저스는 1회부터 5점의 리드를 안았다. 타석에서도 제 몫을 한 뒤 1회말 마운드에 오른 박찬호는 1번 타자 마빈 버나드를 상대로 단 2개의 공을 던진 후 허리 쪽에 통증을 호소했다. 다시 신발끈을 고쳐 묶고 스트레칭을 마친 뒤 몇 차례 연습 투구를 한 박찬호는 버나드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리치 오릴리아를 3루수 앞 땅볼로 처리한 뒤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본즈와 맞붙게 됐다. 

홈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등에 업고 타석에 들어선 본즈는 박찬호의 초구 볼을 흘려보낸 뒤 2구째 패스트볼을 받아쳐 그대로 우측담장을 넘겼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이 새로 쓰인 순간이었다.


※ 배리 본즈의 71홈런 (출처: MLB)

자이언츠 덕아웃에서는 모두가 홈플레이트로 뛰쳐나와 그를 환영했고, 본즈는 아들을 품에 안고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전광판에는 ‘71’이라는 숫자가 새겨졌고 본즈의 신기록을 기리는 축포가 구장 밤하늘을 수놓았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된 박찬호는 6분 동안이나 이어진 기나긴 축하 세리머니 이후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후속타자 제프 켄트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이후 경기는 난타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다저스가 8-4로 앞선 3회말, 박찬호와 본즈는 이날 두 번째 맞대결을 펼쳤다. 초구부터 본즈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지만 1루 쪽 파울이 됐다. 2구째 볼을 지켜 본 본즈는 박찬호의 3구째 높은 패스트볼을 받아쳤고 이 공은 가운데 담장을 넘어갔다. 본즈의 시즌 72호 홈런이자 통산 566호 홈런이었다.


 

※ 배리 본즈에게 시즌 71호 홈런을 맞은 직후, 박찬호의 뒷모습

박찬호는 이날 4이닝 동안 8실점(7자책)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9-8로 팀이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왔기 때문에 승패와는 관련이 없었다. 팀도 난타전 끝에 11-10으로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역대 최고 타자로 평가받던 본즈와 정정당당하게 정면승부 한 박찬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많다. 



 

※ 2024년 MLB 서울시리즈에서 시구하는 박찬호 (출처 : 뉴시스)

 

당시 본즈가 맥과이어의 기록에 근접하면서 많은 투수들이 본즈의 대기록과 함께 영원히 따라다닐 피홈런 투수의 불명예를 떠안지 않기 위해 본즈와의 정면승부를 피했다. 나쁜 볼은 골라내고 스트라이크는 여지없이 배트를 내 장타로 연결하는 본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본즈는 당시 무려 177개의 볼넷을 얻었고, 이중 35개가 고의사구였다. 직전 휴스턴과의 시리즈에서도 본즈는 14타석에서 볼넷 8개를 얻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도무지 약점이 보이지 않던 본즈를 상대로도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이날 박찬호에게 2개의 홈런을 뽑아낸 본즈는 이후 1개의 홈런을 더 추가하면서 2001 시즌을 73개의 홈런으로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깬 선수는 없다.


※ 배리 본즈의 2001시즌 홈런 모음 (출처: HI STUDIO)

이날 경기에서 본즈와 박찬호의 희비는 크게 엇갈렸지만 2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이들에 대한 평가는 당시와는 또 달라졌다.

본즈는 22시즌 동안 2986경기, 1만 2606타석, 9847타수, 2935안타, 762홈런, 1996타점, 2227득점, 514도루, 2558볼넷(688고의사구) 타율 0.298, 출루율 0.444 장타율 0.607 OPS1.051 등의 화려한 통산 성적을 기록했다. 이렇듯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주인공인 본즈이지만 끝내 명예의 전당 입성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그가 금지약물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적발되었기 때문. 팀에 우승을 결국 그의 모든 기록은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2001년 10월 모두를 들썩이게 했던 대기록도 그의 약물 전력으로 인해 빛이 바랬다. 


 

※ 약물 투약에 대한 위증 협의로 재판에 출석했던 배리 본즈 (출처 : AFP)

 

반면 당시 대기록의 희생양이었던 박찬호는 역대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하고 명예롭게 현역 생활을 마쳤다. 현재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야구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날 경기에 사용된 공. 경기 사용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파란색 잉크로 본즈의 친필사인이 새겨져 있다. 공의 스위트스팟에는 ‘71-72 HR GM 10-5-01(2001년 10월 5일 경기, 71호 72호 홈런)’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이랜드 뮤지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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